10.13.2012

이영준 (계원조형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선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참고자료다. 내 정의는 아주 간단하다. 참고자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논문을 쓸 때나 삶을 살 때나 참고자료가 중요하기는 하다. 어떤 자료를 참고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참고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고자료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안 된다. 참고는 하고, 만일 정당성이 바닥 나면 언제든지 비판하거나 버리면 되는 거지, 일생을 매달릴 필요는 없는 거다. 거기다가 심리적 의존까지 가면 이건 중대한 병이다. 그건 마치 나침반을 방향을 가리키는 장치가 아니라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험한 세상에 선생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고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리는 학생들이 있다. 단언하건데, 그 학생들은 틀렸다. 존재란 독립적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독립적인 존재를 대체하거나 보상해주지 않는다. 그 존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말이다. 그건 마치 휘발유가 없는데 그 대신 볼펜으로 차를 가게 하려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 휘발유 아니면서 휘발유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연금술사들이 실패한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은 대체의 수사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은 수사법일 뿐이고, 실제로 대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엄마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듯이 말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결핍을 선생에게서 메우려 하고, 선생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워 줄 수 있다고 착각하여 매달린다.

작가로 유명한 어느 교수의 미니홈피를 보고 그런 걸 느꼈다. 학생들이 달아놓은 온갖 락플(악플의 반대말)들을 보고, 얘네들은 중대한 교수신앙병이 걸렸구나라고 느꼈다. 그들에게 교수는 참고자료가 아니라 신이고 스타이고 영웅이었다. 그런 풍조는 아직 성숙이 덜 된 사진계에서 심하다. 대부분의 대학 사진과에서 보이는 양상은, 교수들은 온갖 사진의 수사를 가지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하는 사진이 아니라며 겁을 잔뜩 준다. 자신들은 시나이산 꼭대기에서 사진의 율법이 적힌 석판을 몰래 혼자만 받아온 듯, 그걸 어긴 자에게는 벌이 내려질 거라고 헛방을 잔뜩 놓는다. 교수는 대체로 엄격하지만 또 한 구석으로는 학생들에게 큰 형 노릇을 하며 술도 사주면서 인간미 있는 스승으로 통한다. 물론 간간히 성희롱이나 성폭행도 양념처럼 섞어 놓는 사진과 교수들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모대학 사진학과 교수라는 분이 말이다. 학생들은 이런 모든 성격과 연출 너머로 보이는 교수상에 잔뜩 취해서 이미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교수는 더 이상 참고자료가 아니라 진리고 말씀이고 신이 된다.

여기서 비극은 시작된다. 학생들은 교수에게 심리적으로, 실존적으로 의존한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학생이나 선생이나 둘 다 지푸라기 하나 붙잡고 바다에 떠 있는 듯이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인데, 학생은 선생이 쥐고 있는 지푸라기가 통나무라고 착각하고 결사적으로 교수에게 매달린다. 이런 상황은 학생에게 물론 안 좋고 교수에게도 안 좋다. 자신이 쥐고 있는 지푸라기를 통나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험하다. 올바른 학생이라면 교수가 쥐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해야 한다. 저 사람이 쥐고 있는 것이 정말 통나무일까, 혹시 지푸라기는 아닐까, 과연 뭘 쥐고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심을 항상 해야 한다. 학문의 세계는 절대적인 진리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손에 지푸라기를 쥐고 통나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존적인 의존도 나쁘지만, 심리적인 의존은 더 나쁘다. 허상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 학생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는다. 엄청난 돈을 주고 산 BMW760이 속알맹이는 티코임이 드러났을 때 겪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트라우마다. 교수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와서 징징 거리고 떼 쓰는 학생들을 보면 그런 위기를 느낀다.

빨리 이 학생을 교수의존의 병으로부터 구해줘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 구해야 하는 병이다. 교수가 그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줄 수 있다고 믿으면 그것은 또 다른 심리적인 의존일 뿐이다. 아무리 잘난 교수라 해도 한낱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데, 그가 '한낱'인 이유는, 교수가 다루는 대상이 진리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바다이고, 그 바다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심지어 헤겔이나 공자나 예수 같이 난 사람들도 왜소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세계에서 순위에도 못 끼는 한국의 어느 대학교, 그 중에서도 한참 후진적이고 미개한 사진학과의 교수라면 그는 진리의 바다에 발 한 쪽 끝도 담글까 말까 한 존재이다. 왜 사진학과가 미개하고 후진적인가 하면, 교수들이 부리는 온갖 횡포와 아집, 거기에 고통 받으며 신음하면서도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하는 불쌍한 노예 같은 학생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병을 고치거나 비판할 자정능력이 사진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교수는 참고자료다. 학생은 교수를 그 정도로만 인정하고 존경하면 된다. 교수는 결코 인생의 등불도 아니고 진리의 빛도 아니다. 그도 몰라서 쩔쩔 매는 바보일 뿐이다. 다만 학생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안 보일 뿐이다. 참고로, 미술계에서 스타가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교수 알기를 헌신짝처럼 알고 가볍게 팽개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만일 그들이 교수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철마다 인사드리고 했으면 지금쯤 어느 대학교 교수는 했겠지만 오늘날의 작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참고로, 미술대학 교수들 중에 제대로 된 작가는 거의 없다. 특히 레벨 높은 대학일 수록 심하다. 작가는 이 세상이 맘에 안 들고 몽땅 밸이 비틀리고 금 하나를 그어도 남들 하는 거랑 다르게 하는 사람들인데 대학교에서 선배 교수들, 처장들, 학장들에게 굽신 거리는 것은 기질상 작가에게는 맞지 않는다. 어떤 기금심사를 하는데 H대학 교수가 낸 포트폴리오의 작품이 너무나 촌스럽고 한심해서 간단히 떨어트린 적이 있다. 한참 팔팔한 젊은 작가 발끝도 못 따라가는 촌스런 감각에다가 개념이라고는 애시당초에 쌈에 싸서 말아잡순 분이 교수라고 앉아 있는 꼬라지를 보고 참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이여, 교수에게 대충 대하고 스스로에게 충실해 져라. 그것만이 살길이란다.




[출처] 계원예대 이영준님|작성자 우쭈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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